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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농구하는 모습

농구의 탄생

농구의 유래

대부분의 스포츠가 유래가 모호한 반면, 농구의 유래는 분명하다.

미국 마사츄세츠(Massachusetts) 주 스프링필드 (Springfield)의 YMCA 트레이닝 학교에서 18명으로 시작하여 현재 3억 명 이상의 팬을 확보한 세계적인 게임 농구. 이 경기를 처음 만든 사람은 당시 30세의 이학교 체육교사였던 제임스 네이스미스(James Naismith)였다. 처음 농구에 대한 그의 연구는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같은 학교에서 교장으로 근무하던 루터 귤릭(Luther Gulick)의 지시를 받아 체육교육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농구의 아버지 James Naismith 캐나다 알모트(Almonte) 태생인 네이스미스는 맥길(McGill) 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 정부의 행정관이 되기 위해 3년 간 교육을 받는 수습기간 중에 체육분야로 진로를 바꾸었다. 체육에 남다른 흥미를 가지고 있던 그는 스프링필드의 YMCA 체육학교에 취직을 하였다(당시 스프링필드 대학이 YMCA Training School을 겸하고 있었음). 이것이 바로 네이스미스가 체육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이때가 1890년이었다.

스프링필드 대학에서는 체육시간에 주로 옥외에서 풋볼(foot ball : 미식축구)을 했다. 네이스미스도 처음에는 그 자신이 다니던 맥길 대학에서 풋볼 선수로 뛰었던 경험을 살려 풋볼을 중심으로 교육활동을 전개했었다. 그런데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스프링필드에서는 겨울철이나 우천 시에 마땅히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프로그램이 없었다. 그저 실내에서 하는 행진연습이나 독일식 체조나 스웨덴식의 딱딱한 맨손체조 등이 전부였다. 미국에서의 겨울은 풋볼 시즌이 끝난 시기였고, 봄에 시작되는 야구 시즌 사이의 공백기였기에 학생들의 관심은 자연히 YMCA 체육학교 프로그램에 쏠리게 되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게 체조 프로그램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이런 재미없고 지루한 체조를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학생들의 불평이 당시 YMCA 체육지도자들에게 들려 왔다. 네이스미스도 물론 그 1890년대 당시 YMCA Training School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이다. YMCA 체육학교 교장 Luther Gulick들의 그러한 요구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YMCA 체육학교 교장이었던 귤릭은 그러한 학생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네이스미스에게 학생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새로운 게임의 개발을 맡겼다. 바로 그때부터 네이스미스가 새로운 운동 경기, 즉 실내에서도 축구나 미식축구처럼 재미있고 운동효과도 얻을 수 있는 스포츠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이다.

고민 끝에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운동장에서 하던 풋볼을 규모만 작게 바꾸어 실내경기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튀는 볼 때문에 체육관의 유리창이 깨지고 벽이 망가졌으며,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경기는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네이스미스는 “너무 과격한 스포츠는 실내에서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고, 기존의 스포츠 종목으로는 체육교육의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그 해결방안으로 새로운 경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새로운 경기에 대한 네이스미스의 생각은 배트, 라켓, 스틱 등의 기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볼을 사용하게 된다면 큰 것이어야 하고, 부상의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던 거친 태클을 없애기 위해서는 볼을 가지고 달려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서 내린 결론은 최종 목표물을 지면에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머리 위에 두는 경기였다. 바로 “골대를 높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골대를 높게 하면 슛하는 방법에 제약이 따르게 되므로 볼을 힘으로 다루기보다는 정확하고 재치 있는 컨트롤에 역점을 두어야 함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방법이 학생들의 부상을 방지하고, 좁은 공간에서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머리 속에 새로운 스포츠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 놓은 네이스미스는 곧바로 경기의 계획과 경기규칙의 제정을 시작했고, 귤릭에게 보고하였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새로운 스포츠인 농구가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경기규칙, 즉 최초의 농구경기 규칙 13개 항목을 토대로 새로운 스포츠를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범경기를 YMCA 체육관에 게시하여 공고하였다. 네이스미스는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스포츠의 시범경기를 앞두고 학생들에게 “이번 시도에서 실패하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개발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자신감을 가졌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학생들은 경기에 매료되었다.

참조: 농구경기 규칙 발전사

농구의 탄생, 선수들이 농구하고 있는 모습

농구가 ‘박스 볼’이 될 뻔한 사연

지금은 영어에서 농구를 Basketball 이라는 한 단어로 사용하지만, 1921년까지는 Basket Ball로 표기하였다. 바구니(basket)에 공(ball)을 넣는 종목이었기 때문이다. 네이스미스와 함께 최초로 농구경기를 치른 한 학생은 창안자의 이름을 따 네이스미스볼이라 부르자고 했지만, 그는 “그러면 인기가 없을 것 같다”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만약 네이스미스볼이라 불렀다면 어땠을까? 이 종목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어도 네이스미스가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만약 이름을 넣었다면 이를 이용해 특허를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특허를 내라고 주위에서 권고했는데도 그는 “세계에 널리 퍼지면 좋겠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농구를 발명할 당시 34살이었던 네이스미스는 가정환경이 대단히 어려웠지만 농구로 돈을 벌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이다.

네이스미스가 바구니가 아닌 상자를 사용하려 했다는 얘기도 있다. 당시 체육관에 상자가 없어서 급조한 바구니를 경기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만약 상자를 사용했다면 ‘바스켓볼’이 아니라 ‘박스 Box Ball’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농구가 탄생한 이후 아직까지 변함이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림Rim의 높이다. 오늘날 규정에 따르면 림은 수평인 바닥에서 305cm 높이에 부착되어 있어야 한다. 305cm는 당시 첫 경기가 열린 YMCA 체육관의 높이가 10피트(305cm)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네이스미스는 1891년 겨울에 교지에 농구 규칙을 설명한 팸플릿을 만들었고, 1892년에 이를 배포했다. 1892년에 배포한 첫 광고 내용은 아래와 같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새로운 게임, 농구!

공을 차는 대신 손으로 다루며, 발로 차서 넣는 대신 던져서 넣으며, 굴리면서 가지 않고 들고 갑니다. 축구처럼 팀플레이(Team Play)와 태클(Tackle), 블록(Block), 패스(Pass)가 가능합니다. 각기 팀을 짜서 규모에 따라 실내나 야외에서 모두 가능합니다. 선수들과 관중들, 모든 이에게 신나는 운동이 될 것입니다.